대한민국 10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민주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TV프로그램 안내
3·1절 100주년 기념 부산 한얼고등학교 전교생 플래시몹 …
제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기념식 참가 신청 안내
학술회의 <3·1 대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 민주…
[독립견문록 ⑩충칭 (上)] 강제 징집된 조선인들의 `가장 …
[독립견문록 ⑨시안] 혈전 맹세한 광복군…한반도 침투 직…
[독립견문록 ⑨시안] "생 마감할 때까지 통한의 역사 증거…
[독립견문록 ⑧치장 쭌이] 이동녕 거주지는 빌딩 사이 폐가…
[독립견문록 ⑧치장 쭌이] 한국인 하나 찾지 않는 치장 박…
부끄러운 100주년
부끄러운 100주년
조르주 르페브르가 쓴 『1789년의 대공포』의 제1장의 제목은 ‘굶주림’이다.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민중은 마치 물이 코밑까지 찬 상태로 연못 속을 걷고 있는 사람과 같다. 바닥이 조금이라도 꺼져 내리거나 물결이 약간이라도 치게 되면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프랑스대혁명 직전 프랑스인들이 맞닥뜨린 현실의 핵심 단어가 바로 ‘굶주림’이었다는 통찰이다. 굶주림에 가장 민감한 것은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이었던 탓일까, ‘그날’, 빗속에 무기를 들고 바스티유를 향해 행진한 사람들 대부분은 여성들이었다. 오늘날로부터 230년 전 이야기다. 그로부터 130년이 지난 1919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지 9년이 지난 바로 그 해 3월 1일, 흰 옷 입은 조선의 민중들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염원하며 한반도 전역을 뒤엎는 만세운동을 벌였다. 다치고, 체포되고, 죽을 수도 있는 거리로 저마다의 결의로 쏟아져 나온 민중들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올해는 그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적어도 굶주림은 면했으니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수탈체제로부터 해방된 우리는 지금 얼마나 행복한 것일까? 세계사적으로 3.1운동은 1917년 소비에트 혁명의 성공, 191 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그리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내적으로 3.1운동은 오히려 프랑스대혁명의 전통과 맞 닿아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것은 3.1운동이 단순히 소위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일으킨 운동이 아니라, 굶주림으로 상징되는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염원한 민중의 투쟁이라는 의미이다. ‘굶주림’ 상태의 민중들 3.1운동에서 우리가 흔히 놓치는 것은 당시 민중들의 생활상과의 관련성이다. 1910년 병탄과 함께 조선의 경제는 일본으로 반출할 식량과 원료의 생산지로, 그리고 일본 상품과 자본의 반입지로, 즉 식민지 수탈경제체제로 편입되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3.1%의 지주가 전체 경작지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고, 땅이 전혀 없거나 극히 적어서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빈농이 77.2%나 되는 등 극단적으로 불균등한 토지소유 관계가 자리잡게 되었다. 광대한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되었고 다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헐값으로 매각됐다. 임야도 광산도 대부분 국유 내지 일본인이 소유하게 되었다. 농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도시의 부랑자가 되어 떠돌았다. 1910년 ‘회사령’은 조선의 공업도 제국주의 식민지의 수탈경제체제로 편입시켰다. 1911년부터 10년간 ‘일본인 기업’은 급격히 증가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인의 공장 수는 6배, 자본금은 14.25배. 종업원 수는 3.9배, 그리고 생산총액은 약 10배로 늘어났다. 이 조차도 경공업이 지배적이어서 예컨대 정미업은 공장수로는 전체의 23%, 생산액으로는 전체의 56%를 차지할 정도였다. 정미업 외에도 방적, 경공업 등 원료 약탈과 관련된, 식민지적 성격을 농후하게 띠고 있었다. 이 속에서 노동자들은 어떠한 법률적 보호도 받지 못 했고, 무제한의 착취와 억압에 노출됐다. 노동자의 기본권을 규정하거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안전한 노동을 도모하기 위한 어떠한 법률도 없었다. 농촌사회의 붕괴는 도시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고, 부랑자로 표현되는 대량의 실업예비군을 양산했다.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과, 최저생활도 유지할 수 없는 기아임금이 노동자들에게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총독부에 의한 무단정치로 조선인은 아무런 정치적 권리도 갖지 못 했다. 학교에서는 조선어를 가르치지 못 하게 했고 헌병, 경찰기관, 심지어 육군을 전국 각지에 포진시켜 조선인들을 억압했다. 조선은 하나의 감옥으로 변했고 조선인들은 쇠사슬에 묶인 노예상태로 전락했다. 그 가운데 식민지 조선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 농민들의 삶은 프랑스대혁명 전야와 같은 ‘굶주림’에 민족적 억압을 더한 지옥이었다. 3.1운동은 4월말까지 두 달간 전국적인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기록을 보면 3월 하순부터 도시지역과 공업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의 시위, 파업, 그리고 노동자대회가 이어져 시내 곳곳에서 시위와 투쟁이 이어졌다. 농민들은 봉화, 횃불시위 등 다양한 형태의 시위로 참여했다. 장날에는 독립선언식을 시작으로 폭동의 형태로 시위는 전개됐다. 3월 하순과 4월 상순에 벌어진 총544회의 만세시위 가운데 폭동형태의 투쟁이 207회로 38%를 차지할 정도였다. 프랑스대혁명은 2년간의 기간 동안 구체제(앙시앵레짐)를 전복시켰으나 3.1운동은 2달의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가 식민지배의 폭압 앞에 무릎을 꿇고 사그라들었다. ‘굶주림’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3.1운동은 혁명으로 불릴 만하다. 그것은 그 주체가 노동자, 농민, 여성, 부랑자 등 소위 억압받는 민중들이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재작년(2017년)에 6월항쟁을 그린 ‘1987’이라는 영화가 개봉됐었다. 필자는 6월항쟁을 완성시킨 것은 그 직후에 벌어진 7,8월 노동자대투쟁이라고 생각한다. 6월항쟁의 거리에서 나라의 민주화를 외쳤던 민중들이 직장의 민주화를 외치며 투쟁의 주체로 나선 것이 7,8월 노동자대투쟁이다. 6월항쟁을 상징하는 이한열열사 장례식 사진에는 만장 외에는 아무런 깃발이 없다. 그야말로 조직화되지 않은 시민들의 항쟁이었음을 말해준다. 7,8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비로소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민중들의 조직이 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6월항쟁이 민주주의를 구출했다면 7,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부터 민주주의의 실질이 시작된 것이라 믿는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역시 6월항쟁과 같다. 3.1운동은 한 때의 고립적인 운동이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의 조직적 운동으로, 북만주벌판의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3.1운동이 성공한 운동이라면, 바로 이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는 격발이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 3.1운동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에도 수많은 선열들이 조선의 독립을 외치다 목숨을 잃었다. 그 분들이 꿈꾼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우리는 100년 전 그 분들이 염원했던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수립과 함께 임시정부의 첫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채택한다. 이 헌장은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언한다.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이다. 비록 망명의 정부였지만 이 역시 프랑스대혁명의 경로와 같다. ‘임시헌장’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1940년 중경에 들어간 임시정부는, 독립된 나라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 건국강령을 채택한다.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대생산기관, 토지, 광산, 운수, 은행, 교통 등은 국유로 하고 중소기업은 사영으로 한다, 일제로부터 몰수한 재산은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무산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 노인, 아동, 여성의 야간노동 금지, 의료비 면제 등”이다. ‘굶주림’으로부터 시작한 혁명의 정신이 맞닿은 지극히 마땅한 청사진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오고 나라가 동강이가 나고 전쟁이 났다. 전태일이 죽었고 광주의 학살이 이어졌고 IMF를 맞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노 혁명가들이 다시 살아와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당신들의 꿈을 이루었다고 좋아하실까, 아니면 이런 나라를 보려고 죽기를 각오했단 말인가 하고 땅을 치실까. 불행하게도 지금의 우리나라는, 분단은 말할 것도 없고,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이 넘쳐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나라를 꿈꾸었던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원대한 청사진과 너무나 먼 나라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조르주 르페브르의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저 기념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부끄럽다. “민중은 마치 물이 코밑까지 찬 상태로 연못 속을 걷고 있는 사람과 같다. 바닥이 조금이라도 꺼져 내리거나 물결이 약간이라도 치게 되면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부끄러운 100주년
부끄러운 100주년
조르주 르페브르가 쓴 『1789년의 대공포』의 제1장의 제목은 ‘굶주림’이다.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민중은 마치 물이 코밑까지 찬 상태로 연못 속을 걷고 있는 사람과 같다. 바닥이 조금이라도 꺼져 내리거나 물결이 약간이라도 치게 되면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프랑스대혁명 직전 프랑스인들이 맞닥뜨린 현실의 핵심 단어가 바로 ‘굶주림’이었다는 통찰이다. 굶주림에 가장 민감한 것은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이었던 탓일까, ‘그날’, 빗속에 무기를 들고 바스티유를 향해 행진한 사람들 대부분은 여성들이었다. 오늘날로부터 230년 전 이야기다. 그로부터 130년이 지난 1919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지 9년이 지난 바로 그 해 3월 1일, 흰 옷 입은 조선의 민중들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염원하며 한반도 전역을 뒤엎는 만세운동을 벌였다. 다치고, 체포되고, 죽을 수도 있는 거리로 저마다의 결의로 쏟아져 나온 민중들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올해는 그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적어도 굶주림은 면했으니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수탈체제로부터 해방된 우리는 지금 얼마나 행복한 것일까? 세계사적으로 3.1운동은 1917년 소비에트 혁명의 성공, 191 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그리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내적으로 3.1운동은 오히려 프랑스대혁명의 전통과 맞 닿아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것은 3.1운동이 단순히 소위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일으킨 운동이 아니라, 굶주림으로 상징되는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염원한 민중의 투쟁이라는 의미이다. ‘굶주림’ 상태의 민중들 3.1운동에서 우리가 흔히 놓치는 것은 당시 민중들의 생활상과의 관련성이다. 1910년 병탄과 함께 조선의 경제는 일본으로 반출할 식량과 원료의 생산지로, 그리고 일본 상품과 자본의 반입지로, 즉 식민지 수탈경제체제로 편입되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3.1%의 지주가 전체 경작지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고, 땅이 전혀 없거나 극히 적어서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빈농이 77.2%나 되는 등 극단적으로 불균등한 토지소유 관계가 자리잡게 되었다. 광대한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되었고 다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헐값으로 매각됐다. 임야도 광산도 대부분 국유 내지 일본인이 소유하게 되었다. 농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도시의 부랑자가 되어 떠돌았다. 1910년 ‘회사령’은 조선의 공업도 제국주의 식민지의 수탈경제체제로 편입시켰다. 1911년부터 10년간 ‘일본인 기업’은 급격히 증가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인의 공장 수는 6배, 자본금은 14.25배. 종업원 수는 3.9배, 그리고 생산총액은 약 10배로 늘어났다. 이 조차도 경공업이 지배적이어서 예컨대 정미업은 공장수로는 전체의 23%, 생산액으로는 전체의 56%를 차지할 정도였다. 정미업 외에도 방적, 경공업 등 원료 약탈과 관련된, 식민지적 성격을 농후하게 띠고 있었다. 이 속에서 노동자들은 어떠한 법률적 보호도 받지 못 했고, 무제한의 착취와 억압에 노출됐다. 노동자의 기본권을 규정하거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안전한 노동을 도모하기 위한 어떠한 법률도 없었다. 농촌사회의 붕괴는 도시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고, 부랑자로 표현되는 대량의 실업예비군을 양산했다.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과, 최저생활도 유지할 수 없는 기아임금이 노동자들에게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총독부에 의한 무단정치로 조선인은 아무런 정치적 권리도 갖지 못 했다. 학교에서는 조선어를 가르치지 못 하게 했고 헌병, 경찰기관, 심지어 육군을 전국 각지에 포진시켜 조선인들을 억압했다. 조선은 하나의 감옥으로 변했고 조선인들은 쇠사슬에 묶인 노예상태로 전락했다. 그 가운데 식민지 조선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 농민들의 삶은 프랑스대혁명 전야와 같은 ‘굶주림’에 민족적 억압을 더한 지옥이었다. 3.1운동은 4월말까지 두 달간 전국적인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기록을 보면 3월 하순부터 도시지역과 공업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의 시위, 파업, 그리고 노동자대회가 이어져 시내 곳곳에서 시위와 투쟁이 이어졌다. 농민들은 봉화, 횃불시위 등 다양한 형태의 시위로 참여했다. 장날에는 독립선언식을 시작으로 폭동의 형태로 시위는 전개됐다. 3월 하순과 4월 상순에 벌어진 총544회의 만세시위 가운데 폭동형태의 투쟁이 207회로 38%를 차지할 정도였다. 프랑스대혁명은 2년간의 기간 동안 구체제(앙시앵레짐)를 전복시켰으나 3.1운동은 2달의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가 식민지배의 폭압 앞에 무릎을 꿇고 사그라들었다. ‘굶주림’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3.1운동은 혁명으로 불릴 만하다. 그것은 그 주체가 노동자, 농민, 여성, 부랑자 등 소위 억압받는 민중들이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재작년(2017년)에 6월항쟁을 그린 ‘1987’이라는 영화가 개봉됐었다. 필자는 6월항쟁을 완성시킨 것은 그 직후에 벌어진 7,8월 노동자대투쟁이라고 생각한다. 6월항쟁의 거리에서 나라의 민주화를 외쳤던 민중들이 직장의 민주화를 외치며 투쟁의 주체로 나선 것이 7,8월 노동자대투쟁이다. 6월항쟁을 상징하는 이한열열사 장례식 사진에는 만장 외에는 아무런 깃발이 없다. 그야말로 조직화되지 않은 시민들의 항쟁이었음을 말해준다. 7,8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비로소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민중들의 조직이 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6월항쟁이 민주주의를 구출했다면 7,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부터 민주주의의 실질이 시작된 것이라 믿는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역시 6월항쟁과 같다. 3.1운동은 한 때의 고립적인 운동이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의 조직적 운동으로, 북만주벌판의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3.1운동이 성공한 운동이라면, 바로 이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는 격발이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 3.1운동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에도 수많은 선열들이 조선의 독립을 외치다 목숨을 잃었다. 그 분들이 꿈꾼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우리는 100년 전 그 분들이 염원했던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수립과 함께 임시정부의 첫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채택한다. 이 헌장은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언한다.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이다. 비록 망명의 정부였지만 이 역시 프랑스대혁명의 경로와 같다. ‘임시헌장’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1940년 중경에 들어간 임시정부는, 독립된 나라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 건국강령을 채택한다.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대생산기관, 토지, 광산, 운수, 은행, 교통 등은 국유로 하고 중소기업은 사영으로 한다, 일제로부터 몰수한 재산은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무산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 노인, 아동, 여성의 야간노동 금지, 의료비 면제 등”이다. ‘굶주림’으로부터 시작한 혁명의 정신이 맞닿은 지극히 마땅한 청사진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오고 나라가 동강이가 나고 전쟁이 났다. 전태일이 죽었고 광주의 학살이 이어졌고 IMF를 맞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노 혁명가들이 다시 살아와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당신들의 꿈을 이루었다고 좋아하실까, 아니면 이런 나라를 보려고 죽기를 각오했단 말인가 하고 땅을 치실까. 불행하게도 지금의 우리나라는, 분단은 말할 것도 없고,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이 넘쳐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나라를 꿈꾸었던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원대한 청사진과 너무나 먼 나라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조르주 르페브르의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저 기념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부끄럽다. “민중은 마치 물이 코밑까지 찬 상태로 연못 속을 걷고 있는 사람과 같다. 바닥이 조금이라도 꺼져 내리거나 물결이 약간이라도 치게 되면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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