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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독립문' 글씨 주인공, 조선 운명 걸린 작전을 짜다(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대담 ② - 동농 김가진 선생 …
글쓴이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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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21 09:04
조회(5459)
#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16766 (1896)













 돋보기 안경에 확대경을 통해 영어신문을 보시는 김자동 회장
 돋보기 안경에 확대경을 통해 영어신문을 보시는 김자동 회장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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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은 누구인가?

지난 1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침 김 회장은 돋보기로 당신 책상 위에 놓은 영자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 연세에 영자신문을 읽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건강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 회장은 대답 대신 기자를 돌아보면서 씨익 웃었다. 마치 이백의 시구 '산중문답'의 한 구절 "웃을 뿐 답을 하지 않으니 마음이 평화롭다"(笑而不答心自閑)라는 구절을 연상케 했다. 아마도 당신은 나름의 신념 속에 '욕심 내지 않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해 봤다.

김자동(金滋東)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1928년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인근 아이런리에서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김의한, 어머니 정정화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이다. 김구, 이동녕, 이시영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의 품에서, 임시정부 어른들의 사랑 속에서 자랐다. 

1946년 조국에 돌아온 후 보성중학교(6년제)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거쳐 <조선일보>와 <민족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사형에 처하자 뒤 돌아보지 않고 언론계를 떠났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요직을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한 이후 줄곧 그들과 거리를 둔 채 살았다.

그는 1980년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모택동 전기> 등을 번역했다. 그러면서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조용수 사장의 명예회복에 심혈을 기울였다. 2004년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농 김가진 초상
 동농 김가진 초상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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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김가진
 

위는 김자동 회고록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에 실린 약력을 간추린 것이다. 김 회장 평생 삶의 발자취가 한국 현대사와 맞물리고 있다. 나는 김 회장과의 대담 진행 순서를 동양 윤리관에 따라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당신 순으로 정했다. 할아버지 김가진 선생에 대해 여쭸다.

"할아버지는 상하이에서 1922년에 돌아가셨고, 나는 1928년에 태어났으니 잘 몰라요. 아버지 어머니를 통해 들었을 뿐이지요. 마침 우리 어머니가 쓴 회고록 <장강일기>에 한 치 틀림이 없이 당신 시아버지 얘기를 적어놨으니 내 얘기에 그 책을 참고하세요."

김가진 선생은 1846년 명문 안동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삶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당시 안동부사였던 김응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생모가 정실이 아니었으므로(서얼, 곧 서자) 과거에 응시할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뒤늦게 규장각 검서관 말직에 올랐다.

이후 유길준과 함께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등 외교통상업무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 고종의 특별 배려로 늦은 나이로 과거에 응시해 급제했다. 급제 이후 홍문관 수찬, 일본공사관참관으로 일본에 간 뒤 주일공사가 된다.

1895년에는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독립협회를 창설해 독립문과 독립공원 조성에 이바지했다. 지금의 '독립문'(獨立門) 글씨를 한자와 한글로 남겼다.
 













 김가진의 독립문 글씨
 김가진의 독립문 글씨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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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가진의 '독립문' 한글 글씨
 김가진의 "독립문" 한글 글씨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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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 선생은 1897년 황해도 관찰사를 제수했고, 1902년에는 국문학교를 설립해 한글 교육에 힘썼다. 1904년 이후 농상공부대신, 법무대신, 비서원장으로 선임됐다. 1905년 민영환과 함께 을사조약에 반대하다가 충남관찰사로 좌천, 1907년 규장각 제학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1919년 3.1운동 직후 제2의 독립만세운동을 기획, 비밀조직인 대동단을 결성해 총재에 취임했다. 그해 10월 아들 김의한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때 의친왕 이강(李堈)의 상하이 망명을 기도했으나 일본 경찰의 방해로 무산됐다.
 













 의친왕 이강
 의친왕 이강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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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끝난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
 

- 의친왕 상하이 망명 기도에 대하여 좀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사정부가 수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는 망명할 결심을 하셨지요. 안창호 임시정부 내무총장에게 연락하자 연통제 요원(일종의 연락원) 이종욱을 파견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기왕이면 의친왕 이강을 동행하는 게 독립운동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동행을 고려했습니다. 당시 할아버지와 이강은 자주 만나 망국의 신세를 한탄하는 등 의기투합했지요. 그 무렵 두 사람은 앞으로 사돈관계를 맺자고 할 만큼 친밀했답니다."


- 그래서 동행하셨나요?
"할아버지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동행하자고 제의하니까 이강이 흔쾌히 동의했답니다. 만일 그때 이강의 망명이 성공했더라면 일제의 거짓 주장에 결정타가 됐을 겁니다. 아울러 우리 임시정부 재정에도 크게 도움이 됐을 것이고요. 당시 고종은 상하이 외국계 은행에 거액의 돈을 예치하고 있었다는데, 그 증서를 의친왕 이강이 소지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두 분 사이에 상하이 잠행 탈출방법을 놓고 의견 차이가 있었답니다. 그때 이강은 간호사 출신인 애첩과 동행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할아버지는 그럴 경우 아무래도 기밀이 누설될 것 같아 아버지를 데리고 이종욱의 안내를 받으면서 먼저 출발했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국경을 넘으면서 읊은 한 구절입니다.

'찢긴 갓에 누더기 입고 삼등 차간에 앉은 이를 / 그 누가 옛 적 대신이라 알 것인가'..."

 













 압록강 철교
 압록강 철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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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이강은 어떻게 됐나요?
"할아버지는 1919년 10월 10일 경의선 일산역에서 열차를 탔습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상하이까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당시 상하이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과 다른 신문에도 보도됐답니다. 할아버지의 상하이 탈출은 '양반계급이 한일 병탄을 지지했다'는 일제의 주장이 거짓임을 드러냈습니다.

이강은 그해 11월 9일 역시 일산역에서 열차에 올랐습니다. 그때도 이종욱이 안내를 맡았습니다. 대동단원 나창언, 동기창, 이을규, 정남용 등이 동행했답니다. 다행히 압록강은 무사히 건넜으나 안타깝게도 그해 11월 11일 중국 단둥에서 일본 경찰 체포조에게 연행됐답니다.

할아버지 상하이 탈출 후 일경은 이강 언저리를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던 모양입니다. 후일 봉오동전투에서 이름을 떨친 최진동 장군까지 단둥역까지 영접 나왔다는데... 그때 의친왕 이강이 성공했더라면..."


김 회장은 말끝을 흐렸다. 지나놓고 보면 나라의 역사도, 개인의 운명도 한 순간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박 선생! 우리 점심 먹고 계속 합시다."

김 회장은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누군가 사람의 일생을 "네 발로 기다가, 두 발로 서고, 세 발로 걷다가 북망산천으로 간다"라고 하더니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듯, 쌍지팡이로 더듬더듬 앞장서는 김 회장의 뒤를 따랐다.

"뭘 좋아 하시오. 내 박 선생이 좋아하시는 대로 안내하리다."
"저는 아무 거나 다 잘 먹습니다. 가까운 데로 가시지요."
"그럼, 이 건물 지하로 갑시다."


동석한 이일선 사무처장과 사무실 직원 등 다섯 사람은 지하로 내려가 그집 명물이라는 '굴국밥'을 들었다. 굴국밥은 시원하고 담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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